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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원혜영이 추억하는 어머니 지명희 여사


내 어머니, 풀처럼 나무처럼 푸른


  

 우리나라 생명운동의 역사를 이끈 풀무원 공동체의 원경선 옹 뒤에는 든든한 지지자요 조력자였던 아내 지명희 여사가 있었다. 그는 원경선 옹과 함께 유기농과 유기농산물이라는 ‘복음’을 한국 땅에서 처음 실천하며 사람을 살리는 농사로 한평생을 살았다. 또 남편을 ‘아름다운 농부’로 만든 ‘부드러운 힘’의 아내, 7남매를 편견 없이 건강한 마음으로 살도록 키워낸 어머니였다. 올 2월 세상을 뜬 그의 삶을 장남인 원혜영 민주당 원내 대표가 추억한다.
 

 

봄비에 돌연 꽃도 소리도 없이 지고 말았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세상 살아가다 소나기라도 맞을 날이면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우산을 들고 서 계씬 어머니를 만난다.


내 어머니 지명희 여사. 이 고랑, 저 고랑, 질척한 밭고랑을 오가며 아흔두 해를 넘으신 어머니. 밝은 날이면 밭에 나가, 해 지면 공동체 식구들 뒤치다꺼리하느라 뙤약볕에 더운 것도, 달 뜨는 줄도 모르시고 평생을 보내셨다.

 

8남매 낳고 산후조리할 때 잠깐 쉰 것 말고는 새벽 5시부터 자기 전까지 관절 연골이 닳아 없어지도록 일해온 어머니는 그래도 큰병 없이 무탈했다. 그게 다 사람 살리는 농사 덕분이라고 하셨다. 내 어머니, 아흔 살이 넘어서도 풀처럼 나무처럼 푸르렀다.


내 아버지 원경선 옹이 1955년 풀무원 농장을 세우고 고아, 거지와 함께 사는 풀무원 공동체를 꾸리시기까지, 1976년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쓰지 않는 유기농업을 시작하면서 정농회(말 그대로 바른 농사를 지향하는 공동체)를 만들기까지, 1960년부터 거창고등학교(공교육 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한 실질적인 대안학교) 이사장을 맡아 참교육을 실천하기까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고문으로, 환경개발센터 이사장으로 일하며 환경과 생명을 존중하는 삶을 살기까지,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이사로 있으면서 어려운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기까지... 내 어머님은 남편을 ‘각성한 농부’ ‘계몽하는 농부’ ‘생명을 풀무질하는 농부’로 성장시킨 아내였다.


“여성이 남성을 끌어안는다”라는 성경구절을 새기며 배화여고보(배화여고의 전신)를 나와 명동에서 타이피스트(당시 최고의 인기직업)로 일하던 인텔리 여성이,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를 가까스로 마친 후 새벽엔 우유배달부, 낮에는 목부로 일하는 청년을 마음에 두었다. 학벌, 신분, 재력, 직업 따위보다는 ‘그 사람’을 들여다볼 줄 알았던 어머니는 그야말로 깨어 있는 신여성이었다. 딸의 마음에 있는 청년을 외할머니가 찾아가 중매를 서고, 두 선남선녀는 ‘저어기,청와대 뒤 어디 조용한 길에서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한평생 남을 위해 살려는 사람과 살아갈 자신이 있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당신을 선택한 겁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남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평범한 말씀이 두 사람을 이어준 끈이었다고 한다. 그 후 70년 동안 두 분은 앞서 걸어가는 사람으로 세상의 ‘지도’를 만들며 살았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법과 ‘소유’대신 ‘나눔’을 추구하는 공동체 운동을 주창해온 ‘인간 상록수’ 원경선 뒤에는 ‘푸른 여성’ 지명희가 있었다.

 고된 밭일 하며, 공동체 식구들 챙기며 평생을 보낸 지명희 여사, 원경선 옹. 거친 농사일에도 그들은 고운 피부에 웃는 얼굴이 생생했다.그게 다 화학비료나 농약 기운 없는 건강한 흙 만지고 살아서라고 했다.

 


두 분은 옥돌 같은 7남매(내 위로 있던 형님 한 분이 전쟁통에 전염병으로 죽었다)를 거리의 고아, 범죄자, 부랑아와 함께 키웠다. ‘같이 일해서 같이 먹자’는 철학으로,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누구든 받아들였다. 일할 수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한다는게 아버지의 철학이자 공동체의 철학이었고, 어머니는 그 뜻을 조용히 따랐다. 공동체 식구들은 다들 지독히 일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쌀이 없어 밀기울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 날이 허다했는데, 어머니는 건더기는 공동체 식구들과 자식에게 먹이고 만삭의 자신은 국물만 드셨다. 그렇게 거친 풀더미 같은 세월이었지만 빠짐없이 ‘함께’였으므로, 괜찮았다. 우리 7남매가 ‘이상한 옷 입은 애들’이라고 학교에서 놀림받아도(미국 자선단체의 구호품 중에 여기저기 나눠주고 그나마 남은 옷들을 적당히 뒤섞어 입었다), 강원도 가서 매일 감자밥만 먹고 살아도 좋으니까 ‘오직 우리만의 아버지, 오직 우리만의 어머니’와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딱 한번 철없이 생각하긴 했어도, 우린 공동체 식구들과 빠짐없이 ‘함께’였다.


1976년 풀무원 공동체가 경기도 양주 땅으로 옮겨 오면서 ‘같이 일해서 같이 먹고 살자’는 ‘함께 일해서 함께 먹고 함께 나누자’로 발전했다. 다음 해 수확할 때까지 최소한의 먹을거리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우리보다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는 철학, ‘배워서 남주고, 일해서 남주자’는 그 철학을 수십년 동안 지키며 살았다. 우리는 이런 아버지,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배움을 얻었고, 그 나눔의 삼투압은 자식들 가슴에 고스란히 배어들었다.


우리 어머니에게는 가난한 목숨이 죄다 당신의 피붙이인 ‘전지적 따뜻함’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이웃이 불행하면 너와 나 함께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그 믿음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모 그룹 회장이 고학생 시절 풀무원 공동체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간 일이 있다. 누추한 차림새의 청년에게 어머니는 새로 빨아 시렁 위에 장 개둔 이불을 내어 잠자리를 마련해줬다. 나중에 그 사람이 큰 그룹의 회장이 됐을 때 제일 먼저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와 그 이야기를 하며 큰절을 올렸단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품어 안았던 내 어머니. 단구인 채 키가 큰 사람, 작은 몸인 채 품이 큰 사람이었다. 7남매가 이만큼이라도 썩지 않고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갖게 한 내 어머니 지명희 여사.


보다 생생하게, 보다 가파르게 어머니 손은 늘 묵은 밭 같았고, 몸은 물 빠진 모래밭처럼 마르셨었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반달같이 고왔던 어머니. 평생 농사일을 해온 데다 화장 한 번 한 적 없는데도 피부가 고운 것은 모두 이 현미밥, 무공해 작물 때문이라며 자랑하셨다. 농약에, 화학비료에, 제초제에, 마구 뿌려대는 농사는 간접살인이요, 자멸행위라고 깨달은 아버지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농사를 짓기 위해 1976년 정농회를 만들고, 유기농법을 시작했다.


시행착오로 엄청난 경제력 손실과 큰 시련을 겪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을 여전히 따랐다. 그렇게 건강한 마음으로 만든 밥이, 고구마순이, 솎음배추가... 살과 피와 뼈로, 그리고 차진 생각과 마음으로 변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풀무원 사상’은 밥에서 나와 밥으로 실천되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농사지어 얻은 건강한 현미밥을 끼니 때마다 지루한 줄 모르고 소중하게 씹던 어머니. ‘현미밥은 나이만큼 씹는 것’이라며 “이 일을 어째. 그 말대로라면 밥 한 숟갈을 아흔 번 가까이 씹어야 할 터인데, 세때를 그렇게 먹자면 우리 내외가 식당을 떠나기는 어려울 것 아닌가. 하하호호”하셨던 어머니.


그렇게 생생하게 산 삶이었어도, 아침이면 혼자 산을 내다보며 남몰래 찢어진 세월이 어머니에게 왜 없었을까. 주일 아침마다 수십명 공동체 식구들의 빨래를 도맡아 하느라 분주한 어머니를 두고 공동체의 한 식구가 ‘사모님 때문에 예배가 매일 늦어진다’고 푸념하자, 어머니는 골방에 혼자 숨어 눈물지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주름 깊은 손으로 기도하시더란다. 다시 방 밖으로 나서면 한 번 찡그리는 법도 없이 달처럼 곱게 웃으시던 내 어머니.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뭐 지금도 당신은 그런 큰 스케일 가지고 얘기하고 그러지. 나는 뭐 일만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니까, 만족하니까 감지덕지지. 하나 불평이 없었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늘 이 말씀만 하셨다. 아버지도 훗날 어머니를 두고 “내 안식구의 100% 협조 속에 풀무원 농장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내 일에 반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하시곤 했다.


담담하고 담대하게 살다 가신 어머니는 올 2월 하느님 나라로 가셨다.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는데 한 이틀 누워계시다가 덜컥 가버리셨다. 큰 고생 안 하시고 가신 게 복이라고, 잘 살아서 잘 가신 거라고 문상 온 이들이 입을 모았다. 어머니가 가신 후 살피니 변변한 유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늙어갈수록 지구에서 격리되지 않으려 점점 더 집착하고 쌓아두게 된다는데, 우리 어머니는 자기 몫의 소유라는 게 없으셨다. 그 시절 여염집 아낙들의 가보1호였던 브라보 미싱 하나 가지지 않으셨다. ‘소유’보다 ‘나눔’을 이야기하는 공동체의 안주인답게 사셨던 것이다. 아버지도 농장과 농장 내의 모든 재산을 훌훌 털어 공익재단인 한삶회에 내놓으시고 스스로 무산자임을 선언했다. 두 어른의 뜻에 따라 우리 7남매는 모친상 조의금(장례 비용을 제외한 전액)을 환경정의연대, 북한 학생 국제화 교육, 부천육영재단, 국제기아대책기구 등에 기부했다.

 지명희 여사가 배화여고보 시절 수놓아 만든 것으로, 한반도의 큰 맥마다 무궁화꽃이 수놓여 있다. 평생 ‘소유’ 대신 ‘나눔’을 생각한 지명희 여사의 거의 유일한 유품이다.

 


물욕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평생 한 번 도 헛된 소원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살아가셨다. 내가 학생 운동 하다 네 번 제적당하고, 강제로 군대 끌려가 최전방에서 소총수 할 때도, 민주화 운동 하다 두 번 감옥에 갈 때도 어머니는 “ 야, 이놈아, 그러지 말아라. 부모 생각 좀 해라” 하신 적이 없다. 다만 “조심해라, 건강해라” 하거나, 그조차도 말씀 안 하고 그저 담담하게 맞아주고 보내주던 분이었다. 감옥살이할 때도 ‘아들이 확신을 가지고 떳떳하게 한 일로 그렇게 들어갔으니까 뭐 차라리 마음 편하다’ 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만나고 오면 별말씀 들은 것도 없는데도 잔뜩 헝클어진 심사도 잘 빨아낸 옥양목처럼 변하곤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마음의 힘이 좋은 분이었다.


집 밖에 세워둔 장난감 같은 전기 스쿠터만 어머니를 추억하고 있다. 자식들이 이 녀석마저 사드리지 않았더라면, 무릎의 ‘윤활유’를 풀무원 농장에 다 바쳐 마당 출입조차 어려워하셨을 것이다. 어머니 가신 후 아버지는 ‘공허하다’는 혼잣말을 자주 하신다. 아흔 살 넘은 남편을 보고도 “옛날 사진을 보면 참 미남자였어.... 지 눈에 도깨빈가?” 하시던 아내가 왜 그립지 않으실까. 갑자기 눈물짓는 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면 내게도 그리움이 밀려와 자꾸 목젖이 갈라진다. 창밖엔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햇빛이 쨍쨍하다. 나는 큰숨 한번 쉬고 어머니 사진을 꺼내본다. 우리 어머니, 박꽃처럼 고우시다.


 풀무원 농장과 풀무원 식품은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별개의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풀무원농장은 1955년 원경선 옹이 전쟁 고아, 불량배 등을 모아 만든 공동체다. 풀무원식품은 장남 원혜영씨가 ‘풀무원 공동체’의 철학을 이어받아 1981년에 연 유기농 생산물 판매점이었다. 그 판매점이 1984년 (주)풀무원식품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현재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가면 풀무원식품에서 운영하는 유기농장과 원경선 옹이 이끄는 ‘평화원’공동체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 이 글은 행복이 가득한 집 2009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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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인터뷰 제3부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


ⓒ 남소연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 1년의 평가라고 본다. 경고로서의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본다."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번 4월 재보선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나'라는 질문에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이렇게 답했다. 낮은 음성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원 원내대표는 두 번의 민선시장을 거쳐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17대 국회에 복귀했으나 이후 실시된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을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채 대권과 제1당의 자리를 내준 쓰라린 경험을 가슴에 담고 있다. 민주당은 지금 그 아픈 경험을 한나라당에게 되돌려주려고 한다.

용산 참사 관련 김석기 내정자는 민주당의 '꽃놀이패'

민주당에게 오는 4·29 재보선은 다음 총선과 대선 때까지 이어질 재보선 장정(長征)의 출발선이다. 2010년 지자체 선거는 그 장정의 중간 반환점이다.

이명박(MB)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 최초로 표출되는 이 선거의 결과에 따라 정국 주도권의 향방이 결정된다. 여당이 승리하면 이 대통령의 국민적 영향력 확인으로 주도권이 강화되겠지만, 패배할 경우 이 대통령의 정국주도권 약화와 당-청 갈등으로 여권의 분란이 앞당겨질 수 있다.

민주당으로서는 4월 재보선에서 승리하려면 그것의 전초전 성격을 띤 2월 임시국회에서부터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원내사령탑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해 달라는 청와대의 경고성 주문에도 불구하고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용산 참사에 대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정치적 책임을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김석기 내정자의 임명을 철회할 경우, 리더십에는 타격을 입겠지만 용산 불씨는 잠재울 수 있다. 반면에 임명을 강행할 경우 용산 참사를 둘러싼 지속적 논란의 불씨가 되면서 4월 재보선거 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홍 원대대표가 전자(前者) 쪽이라면, 청와대는 후자(後者) 쪽이다.

야당으로서는 '꽃놀이패'다. 임명을 철회할 경우, MB의 리더십에 타격을 입혀 이른바 MB악법의 추진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임명을 강행할 경우, 용산 불씨를 살려서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해 4월 재보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지난 총선 이후 빼앗긴 정국 주도권을 되가져올 수 있다.


1차 입법전쟁에선 '판정승'... 2차 입법전쟁이 관건





ⓒ 남소연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민주당이 정국 주도권을 가져갈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또 83밖에 안되는 '다윗당'의 온순 이미지의 원 원내대표가 172석이나 되는 '골리앗당'의 승부사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이길 거라고 예상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1월 '입법전쟁'을 거치면서 상황이 달라져졌다.

그 중심에 정세균 대표와 원혜영 원내대표가 있다. 원 원내대표는 정세균 대표와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고 했다. 두 사람은 17대 때 원내대표(정세균)와 정책위의장(원혜영)으로 함께 일했다.

원혜영 원내대표가 정치인으로 내세우는 상품 가치는 '일등 정치인'이다. 여기서 '일등'은 모범생을 연상시킨다. 외모와 스타일도 '온유한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 강한 승부사 이미지의 홍준표 원내대표와는 정반대다.

싸움을 먼저 건 측도 홍 원내대표다. 한미FTA비준안을 상정한 뒤에 이제는 입법전쟁이라고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1차 입법전쟁에서는 원 원내대표가 '판전승'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원 원내대표가 꼽은 1차 입법전쟁의 승인(勝因)은 입법 절차와 내용에 모두 문제가 있었다고 본 국민 인식 덕분이다. 그는 "법 자체가 악법이라는 것과, 절차와 과정을 무시함으로써 국민을 무시하고 있다는 국민 인식이 대통령의 독려와 경위까지 동원한 거대여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2차 입법전쟁이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이미 2월 임시국회에서 '쟁점법안'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1차 때는 본회의장 점거농성이라는 최후 수단을 사용했지만 또 다시 점거농성을 하기는 부담스럽다. 그의 말대로 쉽게 점거농성을 못하도록 국회 회의장도 '요새화'되었다. 또 다시 강행할 경우 여론의 역풍이 불 수 있다.

"1·6 여야 합의문은 휴전 아닌 종전협약서다"

그는 일단 원내 3교섭단체 대표들이 서명한 1월 6일 합의문에 해답이 다 있다고 했다. 그는 "입법전쟁은 휴전한 게 아니라 종전한 것이고 여야 합의문은 종전협약서다"면서 "그래놓고 (한나라당이) 다시 전쟁한다고 하느냐"고 일축했다. 여야가 합의문대로만 하면 싸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정치가 합의한 대로 되어 왔던가.

- 야당 원내대표로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정권이 (이 당에서 저 당으로) 두 번은 바뀌어야 정치적 민주화가 완성된다는 말이 있는데, 한나라당이 18대 국회를 수준 높게 원만하게 운영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철벽을 상대하는 느낌이라서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강경투쟁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야당에게 투쟁은 필요조건일 뿐, 대안이 충분조건"이라면서 "대안정당, 정책정당으로 외화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 일부에서는 한나라당은 (10년 동안 야당 하면서) 여당 하는 방법을 잊어먹었고, 민주당은 아직도 여당인 줄 착각한다고 한다.

"연말국회에서 잘 싸워서 그런 부분은 많이 해소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투쟁을 안 하면 우리가 깔리니까, 존재가 부정 당하니까, 야당으로서는 투쟁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고민은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대안정당, 정책정당이 돼야 국민들이 우리를 지지할 텐데, 그렇게 드러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





한나라당 홍준표, 민주당 원혜영, 자유선진당 권선택 원내대표가 지난 1월 9일 녹화된 KBS 2TV 토크쇼 '박중훈쇼-대한민국 일요일밤'에 출연해 국회 파행과 폭력사태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원내대표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목로주점'을 부르고 팔씨름을 하는 등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 KBS제공


그는 1차 입법전쟁 직후 KBS '박중훈 쇼'에 출연했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국회에서의 싸움과 출연은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 KBS '박중훈 쇼' 출연에 대해 언론 비판이 많았는데 당내와 지역구 반응은 어땠나?
"저는 뭐 언론이 그런 정서 있을 수 있다고 보는데, 거기 나가는 것까지 눈치보고, 거기까지 나가서 서로 싸우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학생운동-CEO-국회의원-시장 경력은 MB와 유사

81년 풀무원 식품 창립...부친 원경선옹은 55년 풀무원 공동체 설립


원혜영 원내대표를 얘기할 때 그의 부친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부친의 건강이 어떠신지부터 물었다. 그는 "아버님이 우리 나이로 아흔여섯이신데 작년부터는 쇠잔해지셨다"면서 "백 살까지는 사셔야 하는데"라고 했다.

부친 원경선(95)옹은 우리나라 유기농의 대부로 통한다. 원옹은 1955년에 경기도 부천에 개간도 안된 땅 1만 평에 기독교 공동체 농장을 세웠으니 그 농장 이름이 풀무원이다. 원옹은 1976년 경기도 양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서 평생 나눔과 공유의 철학을 실천하며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 왔다.

이를테면 풀무원 공동체에서 화학 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법을 시작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정농회를 창설해 바른 농사를 실천하고, 이기적 사유욕을 버리고 더불어 사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 한삶회를 설립했다.

원옹의 풀무 정신은 장남인 원혜영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학과에 입학한 그는 71년 서울대 교양학부 학생회장을 맡아 유신독재에 맞서 학내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2번 복역하고 4번이나 제적을 당했다. 그는 80년까지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96년에야 서울대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81년에 친환경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풀무원 식품을 창립했다. 지금은 경영에서 손을 뗐지만, 그 회사가 바로 오늘날 국내 최대의 친환경 자연식품회사로 성장한 풀무원이다.

그는 92년 민주당 공천으로 14대 국회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정치개혁운동에 참여했다. 95년 김대중 전 민주당 총재가 정계복귀하면서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해 96년 선거에서 국민회의 후보에게 390표 차이로 석패했다.

96년 당시 총선을 앞두고 꼬마민주당은 ' < 모래시계 > 검사'로 유명한 홍준표 변호사를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인 적이 있다. 그는 그때 노무현, 유인태, 이철 전 의원 등과 함께 홍 원내대표를 만난 인연이 있다. 15대 총선에서 홍 원내대표는 신한국당 공천으로 출마해 국회에 들어왔으나 그는 떨어져 사적인 교분이 없다가 18대 국회에서 여야 원내대표로 만난 것이다.

이후 그는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합류해 98년부터 민선 부천시장을 두 번 연임했다.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17대 국회에서 다시 정치에 복귀했으며 18대 총선에서도 연속 당선되었다.

학생운동, CEO, 국회의원, 시장으로 이어진 그의 경력은 고려대 상과대 학생회장, 현대건설 CEO, 국회의원, 서울시장으로 비슷한 코스를 거친 이명박 대통령의 이력과 자연스레 대비된다. 두 사람이 14대 국회에서 정치 입문한 점과 15대 국회에서 실패하거나 중도하차한 이후 자치단체장으로 방향을 튼 점도 같다.

다른 점은 MB가 최연소 전문경영인으로서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고 천만 인구의 서울시장을 하면서 청계천 복원이라는 화려한 실적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기업 활동은 불도저식 삽질경제일 뿐이고, 청계천은 '역사를 상품화한 조경사업'일 뿐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에 비해 국내 최대의 친환경 자연식품회사 풀무원을 창립한 것부터가 친환경과 소비자 주권 시대를 내다본 혜안이라는 지적이다. 또 민선시장을 두 번 하는 동안 '문화의 도시 부천'을 만들었다. 96년에는 사재 20억원을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해 수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리없이 실천해왔다.




수권정당 면모 갖춰 '킹 메이커' 역할하겠다?





ⓒ 남소연


정치인은 대개 3선 이후부터는 새로운 정치적 진로를 모색한다. 그의 정치적 진로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3선 의원에게는 물어보는 것이 일종의 '예의'다. 그는 일단, 3선이 아니라 '5선'이라고 응대했다.

- 3선 정치인으로서 이후 정치적 진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경기지사에 도전하나.

"저는 국회의원은 3선이지만 (부천 시장 재선을 포함해) 5선이다. 경기도나 부천시 일이나 생활정치, 자치행정이라는 점에서 같은 것으로 본다. 시장 때 보람 있게 일을 했는데 같은 성격의 일을 또 할 필요가 있는지 회의적이다. 17대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시장을 중도사퇴하고 총선에 나섰을 때 시민들이 이해를 해주셨는데, 이번에 또 그렇게 하는 것은 큰 부담이다.

민주당이 야당으로서 새롭게 위상을 정립해서 수권정당 면모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 18대 국회에서 야당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기대받을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을 갖도록 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사실상 야당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에 "우리로서는 뼈아픈 지적인데, 상당 정도 일리가 있다는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가 대안으로서 보다 분명하게 인정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민주당의 간판과 얼굴(대권주자)이 약하거나 없다는 지적에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라면서도 "그러나 당내에서 새롭게 평가받는 신진 지도력으로 정세균, 추미애, 송영길, 김부겸 이런 분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민주당과 신진 정치인들이 한나라당과 박근혜 전 대표의 대안으로 국민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킹 메이커'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2009.02.08 오마이뉴스 황방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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