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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 원혜영 의원은 인상이 참 좋지 않아요?"

 

후배 사진기자가 옆에 오더니 이렇게 귀띔한다. 원 의원의 인상이 좋다는 말에 공감했다. 실제로 원 의원을 만난 첫 느낌은 ‘인자함’이었다. 의원실로 들어서는 순간 환하게 웃으며 기자들을 맞아주는 행동이나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 그런 느낌을 들게 한 모양이다.

 

곧바로 앨범 토크에 들어갔다. 본인도 40~50년 전 과거 사진들이 낯설었는지 한참동안 추억들을 되짚었다. 이윽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손에 쥐며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이 유독 많다는 원 의원은 "그때는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행복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음이 풍요로웠다는 원 의원의 코흘리개 시절, 그리고 과거 사진들을 함께 살펴봤다.

 

 

 

 

 

 '자랑스런' 부모님…"풀처럼 나무처럼 푸르렀던 분들"

 

원 의원은 어릴 때 딱 한 번 이런 생각을 했다. "강원도에서 매일 감자밥을 먹어도 좋으니까 오직 우리만을 위한 아버지, 어머니와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그 만큼 부모님은 가족보다는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사셨던 분들이다. 아버지는 1955년 풀무원 농장을 세워 고아, 거지와 함께 사는 풀무원 공동체를 꾸렸다. 또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법과 '소유' 대신 '나눔'을 추구하는 공동체 운동을 주창해왔다.

 

그런 아버지의 뒤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원 의원은 어머니에 대해 "남편을 '각성한 농부' '계몽하는 농부' '생명을 풀무질하는 농부'로 성장시킨 아내"라고 표현했다. 어머니는 밝은 날이면 밭에 나갔고 해가 지면 공동체 식구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뙤약볕에 더운것도, 달 뜨는 줄도 모르고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담담하고 담대하게 살아온 어머니는 올해 2월 세상을 떠나셨다. 원 의원은 "7남매가 이 만큼이라도 썩지 않고 살수 있었던 원동력이 모두 어머니 덕분"이라고 말했다.

 

 

 

 

 

 '꿈많았던' 학창시절…"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자랐다?"

 

원 의원은 부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중 고교를 마쳤다. 중동중학교와 경복고를 다니면서 자취를 한 원 의원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집이 부유해서일까? 이 말에 원 의원은 손사래를 쳤다. 원 의원의 말에 따르면, 7남매 중 유일하게 남자였던 원 의원은 누나들과 함께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때문에 가사일은 누나들이 도맡아 처리했다. 누나들의 도움 덕분에 원 의원은 그야말로 '부잣집 도련님'처럼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원 의원은 그게 썩 좋은 습관은 아니었다고 한다. 최근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떡국을 해먹고 싶었던 원 의원은 직접 떡국을 끓였다. 한번도 해 본적이 없으니 떡국같은 떡국이 나올리 만무했다. 나중에 뚜껑을 열어봤더니 떡이 다 풀어져 하얀 국물만 가득 있었다. "그때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일일이 물어본 뒤 다시 떡국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가사일은 뭐든지 배워놓는게 좋은 것 같아요."

 

 

 

 

 '강제 징집' 군대 시절…"라면, 우동 만들어 편하게 군생활"

 

대학교 때 학생 운동에 전념하고 있던 원 의원은 강원도 철원 철책선으로 군입대하게 됐다. 당시 정권은 학생운동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운동권 학생들 대다수를 제적시키거나 강제 징집을 했다. 원 의원도 그 희생양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군 생활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경험하게 해줬다.

 

재미있는 추억들도 많았다. 그 중 하나는 '라면 사건'. 원 의원은 이전까지 라면 한 번 끓여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직계 고참들이 라면을 끓여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는 수 없이 라면을 끓여보기로 한 원 의원. 그러나 다 끓이고나서 보니 면발이 퉁퉁 불어 우동면발로 둔갑한 것. 그 뒤로 어떤 고참도 원 의원에게 '라면을 끓여라'는 얘길 꺼내지 않았다. "군대 생활, 참 쉽죠잉~"


 

 

 

'운동권 리더' 대학시절…"제적·복학 4번씩, 동문 중 유일무이"

 

원 의원의 대학 시절은 제적과 복학이 반복되는 삶이었다. 제적 당한 횟수만 4번이었고, 그로 인해 복학도 4번을 했다. 1971년 서울대 역사교육학과에 입학한 원 의원은 그해 71년 첫 제적을 당했다. 그리고 강제 징집으로 군대를 갔다왔다. 74년 복학한 원 의원은 75년 관악 캠퍼스 첫 시위를 주동한 인물로 2번째 제적을 당했다.

 

이때 복역을 한 원 의원은 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한 뒤 5.17 쿠데타로 3차 제적 대상이 됐다. 신혼의 달콤함을 느낄 새도 없었던 원 의원은 지명수배령이 떨어져 도망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던 중 원 의원은 81년 다시 한번 제적을 당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비정치적 사유인 풀무원 사업으로 휴학을 하다가 제적 리스트에 올랐다.

 

 

 

 

'드라마 같은' 결혼식…"선배의 노처녀 여동생을 구제해준 셈"

 

원 의원의 결혼은 드라마틱한 면이 있다. 불안한 시국을 통탄하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대학 선배의 여동생과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원 의원은 "그때만 해도 주로 노는데가 빈대떡집이나 소주집이었다"면서 "한참 술을 마시다보면 통금시간을 놓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당연히 부천 집까지 가기는 불가능했고, 그렇게 선배집에서 신세를 지는 일이 잦아졌다.

 

선배에게는 한국일보 기자였던 여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마음씨가 착했던 여동생은 백수 두 명을 위해 매일 아침 밥상을 차려놓고 출근했다. 그렇게 알게 된 두 사람은 1979년 5월12일, 당시 연세대 신학교수였던 김찬국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원 의원은 "그 시절에 29살이면 노처녀에 속한다"며 "결국 노처녀 한 명을 구제해 준 셈이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유능한 여기자가 백수를 구제해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

 

 

 

 

25년만의 '늦깎이' 졸업생…"사회 경험 다하고 96년에 학사모 써"

 

1981년 풀무원 식품을 창업한 원 의원은 86년까지 회사를 경영했다. 그러던 중 민주화 운동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에 풀무원을 친구에게 넘겼다. 당시 일각에서는 "풀무원이 망한게 아니냐"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냐"는 등의 억측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원 의원은 "당시 황당한 소문들이 많았다"면서 "내 길을 가려고 관둔 것이지 망하거나 쫓겨난게 절대 아니다"고 못박았다.

 

제도권 정치에서 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켜야한다고 생각한 원 의원은 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학업을 마무리짓고 싶다고 생각한 원 의원은 94년 학교로 복학해 25년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당시 원 의원은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판단해 교사 자격증까지 땄다고 한다.

 

 

[스포츠서울닷컴ㅣ이명구 배병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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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영 의원은 CEO와 민선시장,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게다가 대학 시절 학생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 4차례 제적을 반복한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1971년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한 뒤 무려 25년 만에 졸업했다. 이러한 경이로운 기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최초일 것이라는 게 원 의원의 얘기다.


교사자격증 취득..."한 때 시간강사 해 볼까 생각"


“25년 만에 졸업했는데 복학한 주된 요인은 교사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국회의원까지 지내다보니 교생 실습이 쉽지 않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실습했어요. 17대 총선 때 낙선할 가능성이 높자 ‘고등학교 선생은 실력이 모자라고, 시간강사로 일 해볼까’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운 좋게 당선 됐는데 나중에라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원 의원은 민주당 원내대표를 1년간 맡아 연말 입법전쟁에서 극적으로 합의문을 이끌어내는 등 ‘MB정부 견제 역할’을 충실해 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원 의원은 “부끄러운 일도 많았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14일간의 농성투쟁을 벌인 탓에 ‘최장기 농성투쟁’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평화적 비폭력으로 점거하고, 여당이 밀어붙일 때 단호하게 잘 싸웠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국민적 여론이 뒷받침해 준 결과죠. 미디어법 등을 모두 통과시킨 채 패잔병 상태로 임기를 마쳤다면 무너지는 집을 내버려둔 채 내 목숨만 겨우 구해서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텐데, 다행히 성공적으로 후임 원내대표에게 인계해줘 홀가분합니다.”

 

 

 
한층 밝아진 원혜영..."속이 다 후련했어요"

 

무사히 원내대표 자리를 이강래 의원에게 물려준 원 의원은 ‘야인(?)’으로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입법전쟁에 대한 부담감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원 의원의 얼굴이 이전보다 훨씬 밝았다. 심지어 원내대표 재임시절보다 목소리도 커지고, 얼굴에 생기가 돈다.


“동료의원들이 ‘시원섭섭하겠다’라고 말하는데 ‘섭섭함이 조금이라도 끼어들 여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답했죠. 정말 지긋지긋했고, 원내대표를 그만둬 얼마나 시원한 줄 모르겠어요. 아마 아쉬워 할 사람도 없을 거예요.(웃음) 제 자신부터 아쉬워하질 않았으니까.”


원 의원은 원내대표 재임시절 ‘본회의장 점거’라는 초강경 카드로 입법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일명 ‘야전 사령관’이다. 그러한 힘을 발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원 의원은 학생운동과 군 생활이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최전방 GP 근무..."소총수 맡아 '박박' 기어다녔다"


“한 시사 만화가가 저를 향해 철책 선을 배경으로 ‘방위출신을 육군병장이 이겼다’라는 그림을 그렸어요. 그것이 정확했죠. 71년 서울대 교양학과에서 학생회장을 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독재화 과정을 밟던 중에 소위 학생운동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학생운동 리더들을 제적시키고 강제 징집 보냈습니다. 유인태 전 의원, 김상곤 경기도교육청 교육감 등과 함께 최전방 GP 경비부대 소총수로 활동하면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고생을 많이 했어요. 저희 부대에 대학생은 아무도 없었고, 중학교 중퇴자가 행정반에 근무했죠.”

 

 

 가사일은 나 몰라라?..."손에 물 한번 안 묻혀봤다"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한 만큼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데.
“누나, 여동생들이 있어서 소위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참 분대장이 제게 라면을 끓여 오라는 명령을 하더군요. 한 번도 라면을 끓여본 경험이 없어 푹 끓여서 갖다 주었더니 면이 탱탱 불어 분대장이 먹지를 못했죠. 그 사건을 계기로 직계고참이 라면을 끓이고 저는 라면을 끓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직계 고참은 저 때문에 제 후임병이 들어올 때까지 라면을 끓여야 했어요.”


-지금도 손에 물을 안 묻히는지.
“못된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어요. 누나들이 많아서 호강한 거죠.(웃음) 결혼하고도 부엌일을 같이 하지 않았어요. 15대 총선에서 낙선해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생활할 때도 떡국이 먹고 싶어 떡을 사다가 끓였다가 ‘죽’이 됐어요. 너무 오래 끓여서 그런 것 같아 다시 떡과 물을 넣었죠. 또 죽이 되더군요. 그래서 집 사람한테 전화를 했더니 ‘물 끓이고 라면처럼 끓는 상태에서 끓여야 된다’라고 하더라고요. 전 떡과 물을 같이 넣고 끓였거든요. 지금은 떡국을 잘 끓입니다.”


-결혼은 어떻게 했는가.
“약간 늦은 나이인 29세에 결혼했습니다. 아내와 동갑이죠. 저는 서울대 71학번이고, 아내의 오빠가 서울대 68학번이었습니다. 같은 시대에 여러 가지 시국 걱정도 하고 민주화 운동을 같이 하다가 아내 오빠와 어울리게 됐죠. 주로 막걸리, 빈대떡집, 소주집을 전전했습니다. 그 당시 지하철이 개통되었지만 10시30분이면 끊겼고, 부천까지 택시타고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죠. 결국 아내 오빠가 수유리에서 여동생과 같이 자취를 한 덕에 종종 그 집에 갔고 아내가 해주는 아침밥을 얻어먹곤 했습니다. 그렇게 안면을 텄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29세 노처녀’를 구제해준 것이죠. 누가 봐도 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웃음)”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동권 꼬리표..."취업 못해 풀무원 창업"


대학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른 원 의원은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 탓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서울대에서 4차 제적을 당했고 지명수배로 도망을 다니기도 했다. 이로 인해 원 의원은 대학을 다닐 수 없었고, 당시 한국일보 기자이던 아내는 신문사에서 해직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자식까지 있었다. 결국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취업마저 쉽지 않던 그는 31세에 1981년 풀무원식품(주)을 창업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운동권이라는 꼬리표 대신 국내 최초 친환경 기업 모델을 제시한 CEO로서 명성을 날렸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유기농업을 시작한 농장입니다. 바로 풀무원 농장이었죠. 아버지는 일종의 양심운동으로 유기농업을 하셨어요. 기독교 농민운동 단체를 이끄셨는데 당신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가르침을 실천하는 건 농사로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라 생각하셨죠. 그런데 해로운 농산물을 익명의 소비자에게 제공할 순 없었답니다. ‘내가 먹는 것은 농약을 안치고 도시의 소비자에게는 더 비싸게 많이 팔 수는 없다’는 것이 아버지 신조였죠. 그런 아버지를 보며 환경문제와 식품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장사꾼 마케팅..."상위 5% 소비자를 겨냥해 성공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더욱이 경제적 여유가 있어 사회, 건강에 관심이 많은 상위 5%를 대상으로 시작한 덕분에 효과도 컸다. 원 의원은 “지금은 경제가 발전하고 소비수준이 높아지면서 중산층까지 풀무원이 스며들었지만 당시는 아니었다”며 “그 때의 풀무원은 대단한 블루오션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전망을 잘 하고 물결을 탄 것”이라 설명한다.


풀무원 창업주로서의 경험과 감각이 부천시장을 하는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는 원 의원은 “늘 남들이 도전하지 않은 곳에 도전하자는 정신이 여러 가지 효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고 말한다. 실제 부천시장 재임시절 국내 대표 영화제로 자리매김한 부천 판타스틱영화제를 개최하고 애니메이션 특성화를 추진해 부천을 ‘문화도시’로 성장시키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풀무원 창업주의 경험과 감각..."부천시장 때 큰 도움 받아"


-부천시장을 역임하며 부천을 대표적인 문화도시로 성장시켰다. 특히 만화 등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소회가 깊습니다. 올해가 대한민국 만화 100주년이라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만화 100년 전 기획전시회에 참석하기도 했죠. 만화에 대한 애호가나 전문가는 아니지만 젊은 사람들이 쉽게 접하고, 좋아하는 분야의 문화로 도시특화사업을 하겠다는 생각했었죠. 부천 오케스트라, 영화제, 만화사업, 애니메이션 사업 등이 대표적입니다. 제가 풀무원 창업자로서 장사꾼 기질을 발휘한 거죠.(웃음) 만화정보센터의 경우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만화 사업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부천시장 재임시절에는 ‘둘리’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해 줬고, 명예시민증까지 주기도 했죠.”


-국회의원과 부천시장 중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운 것은.
“부담이 휠씬 컸고 그만큼 보람과 재미도 있었던 것은 부천시장 재임시절 인 것 같습니다.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부천시민들한테 원혜영 시장 때문에 ‘부천시가 좋아졌다’, ‘즐거워졌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저로서는 굉장히 기뻤어요. 극소수의 시민일 수도 있겠지만, 시장 재임시절 ‘잘했다’고 평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부천 시장 출마…"15대 총선 패배는 줄을 잘못 선 탓?"


-부천시보다 더 큰 규모에서 일할 생각은 없는가.
“부천시장만큼 잘할 것 같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4년간 의정활동을 하다가 15대 총선 때 국민회의 후보에게 불과 390표 차이로 떨어졌습니다. 줄을 잘못 선 것이겠죠.(웃음) 하지만 이 덕분에 부천시장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하느님이 국회의원이 아닌 부천시장을 시키기 위해 15대 총선에서 떨어지게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15대 낙선 이후 중간에 틈이 생겼다. 야인생활은 어떠했는가.
“다행이 그 기간이 짧았습니다. 정치적으로 운이 좋은 편이죠. 원래 13대에 처음 선거에 출마했는데 ‘새정치를 해야겠다’는 이유로 제정구 전 의원, 김부겸 의원 등과 함께 한겨레 민주당을 만들었죠. 낙선한 이후 민주당 공천을 받아 14대 총선(부천 중구 을)에서 승리해 처음으로 등원했습니다.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등원했을 정도로 국회의원직을 빨리 달았어요. 그리고 15대 때 낙선한 이후 부천시장에 대한 자신도 없었고, 중앙정치와는 길이 달라 많이 망설이기도 했어요. 자의 반 타의 반 부천시장에 출마하게 됐는데 막상 되고 보니 사명감도 느끼고, 보람과 재미를 느꼈습니다. 사람이 일할 때 어떤 때는 100%, 120%를 발휘하잖아요. 부천시장 재임시절이 120%의 실력을 발휘할 때였던 것 같습니다.”


원내대표 그 이후…"시간 여유 생길 때 TV나 영화 즐겨봐"


-부천시장 당시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에피소드가 있다면.
“1년간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강좌를 듣고 있을 때 한국 동창회에서 올해의 동문상을 줬습니다. 그 때 적극적으로 추전한 분이 동국대 지리학과 교수님이었어요. 학문의 성격상 신입생 면접을 볼 때 ‘어디 사느냐’ ‘사는 동네가 누구냐’ ‘시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 때 유난히 부천출신 사람들이 많이 갔던지 부천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이 ‘원혜영 시장’에 대해 아주 좋게 평가를 해 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국대 교수님이 저를 섭외해 추천해줬고, 만장일치로 올해의 동문상을 받은 기억이 나네요. "


-또 다른 에피소드 하나만 더 공개해 달라.

"제겐 후원회원인 VIP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가 중소기업 사장일 당시 신입 여직원이 '원혜영 시장을 아세요'라고 묻자 '친구'라고 답했다고 하더군요. 그 동안 누가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서울 화곡동’이라고 답했다는 여직원은 저 덕분에 ‘부천’이라고 답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비록 일부 사람들의 얘기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원 의원은 원내대표 임기를 끝내고 최근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겼다. 주말에는 케이블 TV를 통해 영화를 볼 뿐 아니라 여행을 자주 다닌다고 한다. 심지어 아내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사진 등을 모아 ‘추억 앨범’을 만들 계획이라는 게 원 의원의 설명이다.


[스포츠서울닷컴ㅣ박형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