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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국회의원 원혜영입니다.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입니다. 올해 어버이날은 저에게는 다른 해 어버이날보다 조금은 더 뜻깊게 다가오는 기분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올해 아버님의 백수연을 개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관련글: 제 아버님 원경선 원장님이 백수연을 맞이하셨습니다.

 

 

 

 

 

 

보도된 기사의 처음에 실린 글귀처럼 "아버지와 함께한 60년을 기리며 "참 좋았다"고 반추하는 부자지간(父子之間)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아버지의 백수연(白壽宴)을 여는 자식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에게 있어서 아버님은 살아계신 것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분입니다.

아버님과 함께할 수 있는 이 시간을 매번 감사하면서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하는 동아일보 인터뷰 내용입니다.

 

―백수연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죠? 제가 정말 복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옛날 분들 중에서도 늦게 결혼하신 편입니다. 2002년에 두 분 회혼례를 할 때도 친구들이 정말 구경거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백수잔치까지 했으니…. 저도 들어본 적이 없고, 가본 적도 없습니다. 잔치를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냥 친척이나 친지 대상으로 하면 어디까지 초대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아버님하고 직접 관련된 단체, 개인으로 손님을 국한했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 국제기아대책, 유기농업단체인 정농회(正農會), 그리고 환경정의와 아버님이 50년 가까이 이사장을 맡으신 거창고 분들을 모셨습니다. 문희상 의원은 제 경복고 직계 선배시고,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 제정구 전 의원 등과 함께했던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의 좌장이셨는데 신문에서 백수연 소식을 보고 '왜 나한테도 연락을 안 했느냐'고 하셔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버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워낙 말을 못 알아들으시기 때문에 글로 써서 보여드렸는데 그냥 씩 웃으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당일엔 단상에 올라가셔서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말을 하셨고…."

 

―지금은 경기도 포천 농장에서 지내시죠.

 

"충북 괴산의 풀무원농장에 훗날 '원경선 기념관'으로 쓰려고 건축가 승효상 씨가 지은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지내시다가 2년 전 뇌경색으로 몇 달간 누워 계신 뒤 포천으로 옮겼습니다. 둘째 여동생 부부가 농사지으면서 아버님을 돌보고 있는데 워낙 강인하셔서 재활치료를 받고 난 뒤에는 지팡이 짚고 마당 산책도 하고, 또 자동차로 한두 시간 드라이브하시는 것도 좋아하십니다."

 

 

 

 

―아들의 감회도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광복 직후 정착하신 곳이 바로 지금 제가 사는 곳입니다. 그때는 행정구역이 '부천군 오정면'이었는데 지금은 '부천시 오정구'입니다. 제가 시장(부천시장)을 두 번 하고, 국회의원을 4번째 하는데 바로 아버지가 정착하신 제 고향 군, 면에서 한 겁니다. 전통적인 시골이라면 그런 게 별일 아니겠지만 대도시에 그런 뿌리를 가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제가 복을 많이 받은 거죠. 그런 생각을 하니 감사한 마음이 한층 더했습니다."

 

그는 재작년 '원경선·원혜영 부자의 풀무원 인생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 '아버지, 참 좋았다'(비타베아타 출판)를 펴냈다. 그런데 책의 첫 장이 '풀무원 창업자는 아버지가 아닌 나'였다. 사람들은 자기를 풀무원 창업주의 아들로 '2세 기업인 출신 정치인'이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에도 그렇게 올라와 있지만 아버지는 농장을 했을 뿐 '풀무원'이라는 식품회사를 창업한 건 자신이라는 얘기부터 썼다.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뭔가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라는 일종의 경쟁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천군 오정면'에서 '부천시 오정구'로 이어지는 끈을 통해 아버지의 유산(遺産)을 새삼 느끼는 듯했다. 그 유산은 바로 아버지의 삶이었다.

 

―책 제목이 '아버지, 참 좋았다'인데,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습니다.

 

"책 마지막 문장에 쓴 말이긴 하지만 출판사에서 제목을 잘 뽑은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이 먹으면서 내가 능력이나 노력에 비해 참 복을 많이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복의 근원은 좋은 부모 만나서 잘 배우고, 잘 자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스스로 보기에 당당하지 못한 점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제가 우리 사회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덕분입니다. 아버지한테 가장 일관되고, 핵심적인 게 있다면 바로 실천가이셨다는 겁니다. 초등학교만 간신히 마쳐 콤플렉스가 없지 않으셨겠지만 그만큼 지적 욕구가 강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좋다, 쓸모 있다, 바른 것이다' 싶으면 바로 받아들이셨습니다."

 

1914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난 아버지 원경선은 열일곱에 소년가장이 됐다. 원경선의 아버지, 그러니까 원 의원의 할아버지는 소 두 마리 값에 해당하는 빚만 남기고 가셨다. 그런데 어느 날, 군청에서 농촌자력갱생운동의 수혜자로 선정됐으니 영농자금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신청한 적도 없는 자금이었다.

 

알고 보니 보통학교 6학년 때 장학금을 아껴 쓰고 남은 돈은 학교에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감동한 일본인 교장선생님의 추천 덕분이었다. 땅도 사고 집도 마련했다. 그러나 신앙이 독실했던 원경선은 '주일날' 농장 시찰을 나오겠다는 일본인 관료와 갈등을 빚게 되자 두말없이 땅문서를 돌려주고 농장을 포기한다.

 

―아버님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옳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실천하는 게 당신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유기농이 지금은 친환경 비즈니스로 자리를 잡았지만 아버지는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기농은 일본 기독농민 모임인 '애농회' 발간 잡지에서 처음 보셨는데, 아버지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생명농사라는 점에 '필'이 꽂히신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게 성경 말씀인데 농약과 화학비료로 이웃을 '간접살인'하는 농사를 지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제가 풀무원을 창립할 때 아버지한테 '제가 하려는 것은 비즈니스이지 (생명농사) 운동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아버님의 생활신조가 원 의원의 민주화운동에는 혹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감옥생활은 물론이고 서울대에서 세 번 제적, 네 번 복학이라는 사상 초유의 과정을 겪고 입학한 지 25년 만에야 졸업장을 쥐게 됐지만….

 

"사실 저는 굉장히 소심한 사람인데 민주화운동을 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버지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서울대에 입학한 후 1학년 교양과정부 학생과장인 김진세 교수가 부천 집으로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경인철도를 타고 부천역에 내려도 우리 집은 역에서 10리나 떨어져 있었고, 버스도 하루에 서너 번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걱정돼 찾아오신 거죠. 김 교수님이 아버지에게 '데모를 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게 된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데모를 하는 게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져야 하는 것 아니냐. 잘못하는 일도 아닌데 손해 보니까 하지 말라는 말을 아비가 어떻게 자식한테 하느냐'면서 딸기나 드시고 가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웃으며) 아버지가 (아들의 학생운동을) 부추긴 거나 마찬가지죠."

 

―풀무원을 친구인 남승우 현 ㈜풀무원홀딩스 총괄사장에게 맡기고 정치를 한다고 할 때는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아버님은 평소 '정치는 도덕 이하'라고 말씀하셨다던데….

 

"하나님 기준으로 바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기준으로 잘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사람의 기준으로는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돈의 유혹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기에 '돈이 필요하면 사업을 계속하지 왜 정치를 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죠. 아버지는 제 뜻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낸 60년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참 좋았다'고 하는 건 어찌 보면 '기억의 재구성' 같은 것인데, 살아오면서 갈등은 없었습니까.

 

"아버지가 농장에 정착한 직후부터 우리 집은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농사에 뜻을 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쟁통에 오갈 데 없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희 형제(2남 5녀)를 포함해 늘 20명 안팎이 머물렀죠. 반찬이 왜 이러냐고 불만을 털어놓기 일쑤였고…. 여하튼 저는 남자라 그런 일이 없었지만 누나나 여동생들은 매일 아침 교복을 갈아입을 곳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누나들에게 '강원도 가서 감자만 캐 먹더라도 우리끼리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어머니가 그 얘기를 전해 듣고 가슴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웃으며) 그 덕분에 저는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생활이란 게 이상은 좋지만 얼마나 엉터리인지 너무 실감나게 겪었거든요."

 

―책에 보니 '아버지는 농사만 유기농으로 했던 것이 아니라 아들도 유기농으로 지으신 분이었다'고 써놓으셨던데,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습니다.

 

"유기농이란 화학비료나 농약이 아니라 땅의 본성을 살려 그 힘으로 농사를 짓는 겁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데 제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원경선이라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일찍이 저의 본성을 알고 그걸 살려주셨습니다. 나대로의 길을 가게 해주신 거죠. 그리고 아버지는 무슨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 자식에게 배우고 따라하게 했습니다."

 

거창고 교장을 지낸 전성은 선생은 원경선 옹을 '영원한 이사장'이라고 부른다. 전 선생은 '아버지, 참 좋았다'라는 책의 서문에 "이 책은 원혜영의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가 아니다. 정신은 이어져 간다는 이야기다"라고 썼다.

 

아버지의 정신이 아들에게 이어진다는 것, 그게 바로 영원한 삶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래도 인터뷰 내내 기자의 머릿속을 채운 건 '아버지, 참 좋았다'라는 그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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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원혜영입니다.

오늘은 뒤늦게 부모님 이야기를 한번 꺼내볼까 합니다. 막상 어버이날에는 들려드리지 못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시겠지만 제 아버지는 풀무원 농장을 세우신 원경선 옹입니다. 아흔이 훌쩍 넘으셨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농장 일을 직접 챙기셨을 정도로 정정하십니다. 어머니 지명희 여사님은 지난해 2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 평생 나눔을 실천하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편하게 살았던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못사는 집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맘 편하게 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선 경기도 부천의 황무지 1만평을 개간하여 협업농장을 만드셨습니다. ‘함께 일해서 함께 먹자’는 철학을 바탕으로 운영된 공동체, 여러분이 알고계신 풀무원 공동체가 시작된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아버님의 공동체 철학은 투철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농장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일할 수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저희 7남매도 농장에서 일하는 분들과 한방에서 먹고 자야 했습니다. 농사일이나 허드렛일도 그분들과 똑같이 시키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솔직히 그땐 아버지가 싫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고된 밭일 하며, 공동체 식구들 챙기며 평생을 보낸 지명희 여사, 원경선 옹. 거친 농사일에도 그들은 고운 피부에 웃는 얼굴이 생생했다.그게 다 화학비료나 농약 기운 없는 건강한 흙 만지고 살아서라고 했다.
 
반면 어머니는 말없는 헌신으로 뒤를 받쳐 주셨습니다. 협업농장이 제자리에 오르기 전, 공동체 식구들을 괴롭혔던 그 지독한 가난을 모두 함께 버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연 어머니의 헌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창 가난할 땐 쌀이 없어 밀기울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 날이 많았는데, 그 때마다 어머님은 건더기는 공동체 식구들과 저희를 먹이고 만삭인 당신께선 국물만 드셨습니다. 그런 모습이 알게 모르게 전해져서 아무리 힘들어도 다들 별 내색을 안했습니다.

...저는 어땠냐고요?
괜찮았습니다. 가끔 이상한 옷차림 때문에 학우들에게 놀림을 받긴 했지만, 어쨌든 모두 '함께'였으니까요.

바른 먹거리는 국민의 생명이다
… 풀무원 정신을 완성시킨 어머니

 
제가 '아버지가 최고'라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른 먹거리에 대한 투철한 소신, 그리고 원칙을 세우면 이를 반드시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아버지께서 본격적으로 유기농의 관심을 두게 되신 것은 일본 ‘애농회’의 설립자 고다니 준이치 선생과의 만남 이후부터라고 들었습니다.
 
“고다니 선생은 일본이 한국에 못된 짓 많이 했지만, 제발 농사만은 따라가지 말라고 해요. 또, 일본 농업이 한국보다 10년 빠른데 제초제 독성의 잠복기간이 10년이다. 일본에선 제초제의 해악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이제라도 제초제를 끊어야 한국 농업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원경선 옹, 한겨레와 인터뷰 중 발췌
 
우리나라가 난리 속에 굶어죽는 상황에서 벗어나니 이제는 공해로 다 죽게 됐다며 고심하던 아버지. 그런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은,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길은 유기농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소신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지난 1976년 경기도 양주로 풀무원농장을 옮겨 국내 최초로 유기농을 시작하셨습니다.
 
유기농은 비싸서 못 먹는다는 주변의 우려엔 항상 생명의 가치를 들어 반박하셨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안다면 비싸고 싸고를 따질 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먹거리를 먹어야 한다며 단호하게 말씀하시던 모습을 저는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하지만 풀무원 농장은 유기농을 국내 최초로 시작한 터라 수차례에 걸친 시행착오로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시련을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신의 뒷편에는, 늘 어머니가 계셨지요.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뭐 지금도 당신은 그런 큰 스케일 가지고 얘기하고 그러지요. 나는 일만 했어도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니까, 만족하니까 감지덕지지. 하나 불평이 없었어요.”

어머니께선 항상 이런 식으로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든든한 믿음에 의지하여 아버님은 자신의 소신을 펼쳐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진출처 : 노컷뉴스>
 
그런 어머니께도 확실한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렇게 건강한 마음으로 만든 밥이, 고구마순이, 솎음배추가 살과 피와 뼈는 물론 찰진 생각과 마음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밥에서 나와 밥으로 실천되는 ‘풀무원 사상’, 그 시작은 분명 아버지가 여셨지만, 완성은 어머니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곁에서 보며 제가 느낀 것은, 생명에 대한 고집입니다. 바른 먹거리와 바른 교육을 ‘생명’이라던 그 끈질긴 신념을 저는 늘 듣고 보아왔습니다. 어머니께는 나눔이라는 게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함께 살아가려면 나눠야 한다는 것, 나눌수록 더 풍성해지는 있음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먹거리가 국민의 생명이라면 환경은 국토의 생명이며, 살기 위해 나눠야했던 시기를 지나 함께 누리기 위한 ‘나눔’이 필요한 때가 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4대강 개발을 계속 반대하는 이유가 어쩌면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등을 닮아가는 자식의 모습. 제가 부모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면,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