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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농장 원경선 원장·원혜영 의원 父子의 따뜻한 발걸음



올해 초 민주당 원혜영 의원이 오른 전세금 4000만원을 마련하고자 대출을 받은 일이 알려져 화제가 왰다. 탄탄한 중소기업 풀무원의 창업주가, 평소 수십억원의 기부를 해온 그가 돈 때문에 애먹었다는게 흥미롭니다. 그러나 그가 풀무원농장의 설립자이자 한국기아대책기구의 창립자인 원경선 원장의 아들임을 기억한다면 납득할만한 일이다. 최근 아들은 『아버지, 참 좋았다』라는 책까지 냈다.

“땀 흘려 일한자만이 밥을 먹을 수 있다, 돈의 유혹에 끌려 다니지 말라… 그런 가르침 준 아버지, 참 좋았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 30분, 충북 괴산 시내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나타나는 깊은 산골에서 원경서(97) 원장과 원혜영(60)의원을 만났다. 2004년 승효상 건축가가 지었다는 멋들어진 원경선 원장의 집 앞뒤로 풀무원 농장과 로하스아카데미가 보였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로하스아카데미로 직행했다. 마침 점심때라 로하스아카데미에서 준비한 점심 식사에 초대받은 것. 괴산농장에서 수확한 쌀로 지은 윤기 흐르는 쌀밥에 구수한 된장찌개, 보양 음식 닭볶음탕, 싱싱한 고추까지 곁들인 정갈한 식사 이후 비로소 농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에는 국내 최초의 국제 구호 활동 단체인 ‘기아대책 한국지부’와 환경 단체인 ‘환경정의시민연대’, 거창고등학교 이사장 등의 활동을 하며 받은 갖은 감사패와 영어 원서, 유기 농업 책들이 가득하다. 툇마루에는 가래와 호미 같은 농기구도 보인다.

올해 97세인 원경선 원장은 2년 전까지는 손수 농사도 지었으나 요즘은 유기농 공동체 ‘평화원’을 돌보거나 독서 등 소일거리로 하루를 보낸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특강에 나서기도 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이곳과 농장 옆 ‘평화원’에서 보내고, 주말은 다섯째 딸 집에서 지낸다. 민주당 원내대표까지 지낸 3선 의원인 셋째 아들 원혜영 의원은 바쁜 틈틈이 아버지 댁을 찾는다. 고령으로 귀가 어두운 아버지를 위해 바로 옆에 앉은 원혜영 의원. 나란히 얼굴을 마주한 부자의 웃는 모습이 참 닮았다.


전쟁고아, 병든 이와 함께한 공동체 생활


원경선·원혜영 부자의 삶에서 풀무원은 큰 의미를 차지한다. 풀무원은 기업이기 이전에 하나의 공동체였다. 소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소년가장이 된 부친은 젊어서부터 신학 공부를 위해 배워둔 영어 공부가 평생 재산이 됐다.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인쇄업, 건설업 등에서 성공을 이뤘으나 여러 차례의 인생 고비를 넘긴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경기도 부천에 농장을 열고 정착했다.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제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원경선 원장의 농장에는 이미 교회를 통해 들어온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장고아와 갈 곳 없는 노인이 모여 지내고 있었는데 여기에다가 미군들이 보낸 ‘하우스보이’(미군 부대에서 심부름을 하는 전쟁 고아)까지 하나 둘 모여들자 금방 대가족이 됐다.

농장이 공동체로서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게 되자 ‘풀무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농장에 온 식구들을 신앙 공부와 농사일로 풀무질해서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뜻에서였다. 그때가 1965년이었다.

그 공동체가 1970년대 후반 양주로 이동해 유기농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키운 유기농 직물을 판매하기 위해 아들 원 의원이 1981년 서울 압구정동에 조그맣게 문을 연 직판장이 지금의 풀무원으로 자라났다.

원 의원은 1987년 풀무원 대표에서 물러났지만 부친은 2004년 새롭게 둥지를 튼 괴산에서 여전히 농장과 공동체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주인은 아니다. 양주 농장 시절부터 공동체 안의 모든 것을 법인으로 전환해 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들인 나부터 욕심이 생겨서 상속권을 주장할지도 모른다”“상속 문제 때문에 공동체의 원칙이 깨질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려면 미리 법적 장치를 해두어야 한다”고 법적 상속자인 아들 원혜영 의원이 낸 아이디어였다.

괴산의 공동체 평화원에선 지금도 다 같이 모여 산다. 음식을 남기지도 않고, 배고픈 사람도 없다.

“당시 공동체에는 두 부류가 있었어요. 세간에는 한국전쟁 이후 갈 데 없는 전쟁고아나 피난민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렇지 않아요. 아버님의 뜻을 배우고 인생 수업을 위해서 온 굳은 의지의 사람도 있었어요. 아버지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죠. 또 관심으로 그치지 않고 곧 실천으로 옮기셨고요. 1970년대에 건강을 위해 현미식을 권한 분이세요.”

대가족이 모여 살았지만 공동체 생활 원칙은 간단했다. 누구든지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같이 살았다. 대신 땀 흘려 일한 자만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 원칙은 자식들에게도 적용됐다. 원혜영 의원을 비롯한 육남매는 집안일을 하고 받은 돈을 모아 등록금을 냈다.

“일한 사람만 밥을 먹는 건 당연한 거지. 얘(원혜영 의원)는 현관 청소 담당이었어. 내 자식이라고,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 대우 같은 건 없었어요. 오히려 어머님이 손자라고 혜영이만 너무 예뻐하고 손녀들을 구박하니까 내가 나서서 혜영이를 혼을 많이 냈지요.”

 
땀흘려 일한 자만이 밥을 먹을 수 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원경선 원장은 ‘홀트아동복지회’창립자인 해리 홀트와의 첫 만남과 그의 죽음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해 이야기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지난해 어머니를 먼저 보낸 뒤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지셨다”며 이해해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날따라 1950~60년대 홀트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걸 보아 요즘 원경선 원장은 풀무원 공동체가 막 자리를 잡고 한창 탄력을 받아 나가던 시절의 추억에 젖는 경우가 많은가 보다. 힘닿는 대로, 때로는 자신이 굶으면서까지 어려운 이들을 도왔던 시절이었다.

"아들을 대하는 해리 홀트의 진실된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나는 아들에게 뽀뽀를 해주는 등 그런 애정 표현은 잘 못하는데 그 친구는 날 껴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그러더라고요. 홀트가 죽은 후 재단이 설립되어서 이사회에 참석했는데 그해에는 홀트 부인이 양집에 살더니 다음 해에는 부인이 그 집을 팔았더군요. 온 가족이 전재산을 바쳐 위하던 모습이 기억에 선합니다.”(원경선 원장)

덕분에 아들은 정신지체아인 혼혈 고아들과도 어울려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원혜영 의원은 “해리 홀트가 한국에 있어면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분이 우리 아버지”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배울 것이 참 많다. 부친은 자녀들에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늘 해왔다. 더불어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아버지는 굉장히 실천적인 분이세요.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말로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하셨어요. 어떤 일이든 아버지가 늘 먼저 실천으로 옮기고 나면 어머니가 뒤따르는 일들을 챙기셨죠. 그러고 보니 아버지, 아버지가 고아들을 데려오면 어머니가 씻기고 먹이고 기르셨던 일들 말이에요. 이거 어머니와 의논하고 행하신 건 아니죠?”

“그럼. 그냥 같이 사는 거지. 다른 데서는 구박받는 녀석이 우리 집에 오면 웃음을 주는 재간둥이가 되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 신기하게 자기 밥벌이는 한단 말이야.”

“하하. 우리 아버지가 은근히 독재자예요. 사실 공동체 생활이라는 게 안락함이나 윤택함이 있진 않잖아요. 저는 잊어버렸지만 제가 오래전에 ‘강원도 산골에서 감자만 먹고 살아도 좋으니 우리 가족끼리만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했대요. 그 말이 어머니 가슴에 맺혀 있었나 봐요. 지난해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끔 얘기하시더라고요.”

원혜영 의원을 비롯한 형제들은 공동체 생활에 대한 크고 작은 불만은 있어도 반발은 없었다. 불편함 속에서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터. 실제로 공동체 생활은 원혜영 의원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원 의원은 지금도 그때를 떠올릴 때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라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보통 사람들은 하기 힘든 드문 경험을 전 해봤잖습니까”라며 사람 좋게 웃는다.


아버지가 물려준 위대한 재산


재산을 줄여서 공개하는 정치인은 많아도 자신은 국민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부자라고 밝히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올해 초 원혜영 의원은 굳이 자신의 블로그에 자신의 순자산은 채무를 제외하고 7억원쯤 된다고 해명성 글을 올렸따. 미담 기사의 주인공 자리가 영 어색했던 모양이다.

미담의 시작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혜영 의원은 정치 입문 후 자신의 풀무원 지분 20여억원을 장학재단에 기부했다. 지난해 모친상을 치르고 남은 1억여원도 지역 시민단체에 기부했따. 그러나 정작 자신의 지역구에 얻은 99㎡(30평)대 아파트 전세금이 4000만원 오르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급한 불을 꺼야 했다. 이 사연이 알려지면서 한 인터넷 게시판에는 ‘원 의원을 후원합시다’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많은 네티즌이 동참 의사를 밝혔다.

부자에게 전세 자금 대출 미담 이후 이야기를 청했다. 과연 재산은 더 늘었을까. 그러나 “아, 그거요?”라며 멋쩍은 웃음만 돌아온다. 아예 아버지는 한술 더 뜬다. 아들에게 한참 설명을 들은 후에야 “요전에 네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게 그거냐?”란다.

두 사람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선행을 하지 않는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고 옳은 일이라서 할 뿐이다. 아들이 다 자리 잡아 놓은 기업의 대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정치에 입문하겠다고 할 때도 아버지는 두 가지만 물었따. 한 가지는 성경에 있는 대로 바르게 정치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돈의 유혹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혜영이가 대학교에 다니면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몇 번씩 감옥에 드나들어도 옳은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에는 제가 걱정이 됐어요. 돈에 대해서 이끌릴까 봐. 그거 하나 제가 걱정했어요.”

“아버지와 평소 대화를 많이 나누는데 정치를 시작할 때 아버지께서 이래라 저래라 구체적인 이야기는 해주지 않으셨어요. 아마 제가 풀무원을 계속 운영했더라면 지금만큼의 탄탄한 기업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전 그만한 자금이 없었고 지금의 남승우 사장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죠. 대신 제겐 한 기업을 경영해 본 경험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밑천이 됐습니다. 제가 봐도 전 새로운 것을 구상하는 데 능력이 있는 듯 합니다(웃음). 특히 부천시장을 할 당시 문화도시 부천을 만드는데 사업을 통해 쌓은 감각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원혜영 의원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제 2,3대 부천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삭막한 회색 도시 부천을 문화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만화의 거리 조성 등은 그가 재임 시절에 이룬 것들이다.

40대에 정치에 입문해 벌써 20년 가까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그는 사람 냄새 나는 정치인으로 평가를 받는다. 얼마 전 원혜영 의원은 아버지의 그 많은 가르침을 녹여 책으로 냈다. 아버지와 함께한 60여 년 동안 느낀게 얼마나 많은지 책 제목조차 ‘아버지, 참 좋았다’이다. 실제로 원경선 원장은 아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나는 우리 아들이 거의 다 잘한다고 생각해요. 시장을 두 번 하는 동안도 다 잘 해냈고요. 지금도 혜영이를 들쑤셔 봐야 아무것도 나올게 없어요. 살면서 돈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해요. 돈이란 건 감출수록 자꾸 보고 싶고 자꾸 호기심이 생기고 그래요. 그런데 투명하게 내놓으면 마음이 편해요. 당연히 일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지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고 그래요. 넌 아직 몰랐지?”

“하하하. 아버지, 저도 그 부분만큼은 자부심이 있어요. 제 삶은 부정부패 이런 단어와는 거리가 멉니다. 제가 생각하는 농사와 정치의 공통점은 생명을 생명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에요. 말로만 국민이 주인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국민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비지가 자연을 더불어 살리는 유기 농업을 목표로 해오셨다면 제가 목표로 해야 할 정치는 시민이 중요한 정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들의 말을 듣고 있던 원경선 원장은 “정치도 농사도 하나가 돼야지”라며 때마침 불어온 산바람처럼 무던하게 한마디 툭 내어놓는다. 정치를 하는 사람도, 농사를 짓는 사람도 그저 옳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세상, 적어도 원경선·원혜영 부자가 살아온 세상은 그렇다.

출처: 여성중앙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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